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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으뜸으로 나아가는 길, 고대사 바로세우기를 제안합니다.
상태 : 완료 제안자 : 류** 날짜 : 2013-01-27
분과 : 국정기획조정 지역 : 경기도


대한민국의 역사관 문제에서 현대사의 종북성향을 대한민국중심의 역사로 되돌려 놓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박대통령 각하의 심중에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리라 생각되고 또 아주 많은 우국충정지사들의 건의가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글을 올리고자 하는 것은 신화로 포장된 우리 대한민국의 고대사에 관하여 한 말씀 올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대한민국의 고대사는 신화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많은 재야 학자들이 그 신화를 배격하면서 기록만으로도 민족의 역사로 일만여년을 주장합니다.

그 학자들 중에는 임승국교수 같이 영문학 교수로서 영국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배달의 역사를 보고 놀라 한단고기를 기술한 분도 있습니다.
인터넷 방송대학에는 항공대교수가 고대역사를 강의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럼 그들의 주장이 증거도 없이 그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주장의 근거는 확실합니다.
신라, 대진(발해), 고려, 조선을 이어 지금까지 전수된 역사이야기와 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환단고기와 그 속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서적들은 원래 많은 학자들이 보관을 했었고 개개인의 가정에서조차 가보로 이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기록한 중국을 거쳐 유입된 고려의 불교도 ‘일연’이나, 조선의 유교가 세종과 중종시절 그 많은 서적들을 국책사업으로 산화시켰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종조난 중종조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는 우리 조선을 작은 중화의 나라로 인식하는 사대주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어찌보면 고려의 기록들에서 중국의 시조신화보다 더 위대한 신화를 조선이 가지고 있다는 충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 결과적으로 드러난 조선시대까지 많은 개인들이 소장했던 고대의 역사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배달의 기록을 신화로 포장한 그 배경에는 중화우월주의적 고리족의 무존재감을 표현한 수단으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배달의 역사는 그 역사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전된 현대에 증명되는 것이 한문의 기원입니다.
그 기원은 단군능에서 출토된 옥돌에 기록된 한자(漢字)가 5500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은 중대 이대영교수님께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한자(漢字)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은나라의 시조 문제에서도 사서삼경에서 황제 헌원의 후손인 순임금을 동이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은나라의 또 다른 이름인 하나라를 동이족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는 자료도 있다하여 논리적으로 따지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드러난 사실은 어느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옥편을 보면 모든 문자의 아래에 달려 있는 주석의 내용들은 배달의 역사기록에 드러나 있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삼신오제본기, 단군세기 등에 나타난 이야기들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유라시안네트워크(이사장 이민화)>의 공모에 당선되어 쓴 책으로,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천부경과 성경, 무슨말을 하고 있을까?”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들입니다.

천부경을 기록한 그 역사의 기록에 한문(漢文)이 등장한다.
한문이란 보편적으로 화족(華族)인 중국(中國)의 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역사서를 자세히 살피면 한문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중국의 한문기원은 은(殷)나라의 갑골문(胛骨文)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사기>의 저자로서 중국고대역사의 대부인 ‘사마천’도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의 국가라고 했다 기록했다고 한다.
은허 갑골문(胛骨文)의 탄소측정연대는 대강 기원전1500년 전이다.
그림은 중국 ‘제노만보’가 2008년 8월 15일에 발표한 동이(東夷)갑골문(胛骨文)에 대한 기사이다.



http://news.sina.com.cn/c/2008-08-15/073714314025s.shtml
http://news.qq.com/a/20080815/001934.htm

⟪신비동이갑골문경현유방⟫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동이갑골문”이란 기원전 2500년 까지 그 역사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더하여 중국에 존재하는 단군능에서 출토된 흑옥(黑玉)석에 새겨진 문자(文字)는 탄소측정으로 그 역사를 추정한바 기원전 3500년 전에 기록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고대문서에서는 어떻게 기록 했을까?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있는 그 배달(倍達)나라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배달(倍達)나라에서는 이미 한문의 원조인 ‘녹도문’을 만들었다.
그 기록은 신시본기에 아래와 같이 써져 있다.
桓雄天皇又復命神誌赫德作書契(환웅천황 우복명 신지혁덕 작서계)~~~

한웅천황은 또 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 중략 ~ 말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법은 이것뿐이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 후-략 ~ <임승국저 한단고기 169쪽>

또 ‘소도경전본훈’의 기록에는
天符經天帝桓國口傳之書也 桓雄大聖尊天降後 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
천부경천제환국구전지서야 환웅대성존천강후 명신지혁덕이녹도문기지
<천부경은 천제환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환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 이를 기록케 했다>
<임승국저 한단고기 232쪽>

여기에서 개천(開天)의 의미는 천산 서쪽에 살던 천제 환인의 후예가 천산꼭대기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배달(倍達)나라의 사람인 자부선인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은 황제 헌원은 녹도문이 만들어진지 1000년 훨씬 이후의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황제(黃帝) 헌원(軒轅)에 관한 위키리크스 자료의 일부이다.
<황제 시대는 전설 시대이고, 문자가 없으므로 성이 없었다. 갑골문이 등장한 은나라 후반기에 등장한다. ~~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黃帝)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현재까지의 세계사나 동북 아세아의 역사에서 환인(桓因)의 천제(天帝)나라와 환웅(桓雄)의 배달(倍達)나라의 모든 역사는 아직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한문(漢文)을 중국(中國)의 글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기록은 황제(黃帝) 헌원(軒轅) 이전에는 글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동북공정으로 동북아의 역사를 조작하는 중국(中國)이나 세계의 한문학자들마저도 한문(漢文)이 중국의 글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中國)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나 그 역사를 증명하는 발굴된 자료들은 모두 한문(漢文)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시조국가 배달(倍達)의 글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신농의 이야기가 나오는 배달(倍達)나라의 8세 환웅(桓雄)과 중국의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때인 배달(倍達) 14세 환웅(桓雄)으로 천왕(天王) 치우(蚩尤)는 몇 백 년의 차이기 있다.
이 시기가 우리의 시조국가인 배달(倍達)에서는 14대 치우천왕의 시대이다.
배달(倍達)나라의 후손으로 중국의 군주로 인정받은 황제 헌원이 치우천왕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 그를 만나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주었다고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기록하고 있다<임승국저 한단고기 234쪽>.
여기에는 삼환내문경(三皇內文經)이 신선음부경(神仙陰符經)이라고 하며, 자부선생(紫府先生)은 배달나라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이다<임승국저 한단고기 230쪽>.
‘위키리크스’에 나타난 중국역사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청구(靑邱)에서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한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과 일치한다.
사진은 중국학자인 주학연 박사가 기록한 역사책이다.
그 기록에 중화의 고대 주류는 동이족과 동족인 퉁그스 민족이었고 황하지역의 제후인 헌원 역시 퉁그스계통의 서융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는 자신들이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고 한다. 또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거주하는 한족은 묘족, 백족 등, 소수 민족 보다 중원의 한족과 유전적 차이점이 크다. 따라서 대부분의 중국인이 황제의 자손이라는 사마천의 신화는 해체된다고 하기도 했다.

아래의 사진은 고려 말 오은 중에 한 분인 농은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이라 한다.
그리고 이 글은 녹도문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한문(漢文)의 근본은 신시의 녹도문이다. 그 녹도문은 천부경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文字)이다.
그 녹도문의 근본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을 포함하는 우리 민족의 경문(經文)을 바탕으로 하늘의 신(神)과 땅의 사람과의 관계에 서 사람에게 필요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래의 글은 삼성기(三聖記)에 있는 글이다.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 斯白力之天位獨化之神古記云波那留山之山下有桓人氏之國 天海以東之地亦稱波那留之國
오환건국최고유일신재 사백력지천위독화지신 고기운파나류산지산하유환인씨지국 천해이동지지역칭파나류지국

내가 환의 나라를 세울 때 가장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하나인 신이 있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쪼개고 갈라 희게 하는 힘을 가지고 하늘에 자리에 홀로 신이 되신 일신이다.
고대 기록에 이르기를 파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머무른 산 아래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는데 천해의 동쪽 땅에 있어서 역시 파나류의 나라라 칭했다.

일신(一神)과 독화지신(獨化之神)이 말하고자 하는 신의 호칭은 유일신(唯一神)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환인(桓因)이나 환웅(桓雄)을 유일신(唯一神)이라 말하는 분들이 있으나 환(桓)을 건국한 주인공이 ‘나 오(吾)’이며 그 유일신(唯一神)은 자신을 도와준 3인칭이 되기 때문에 유일신(唯一神)과 구분되는 환인(桓因)은 사람이다.
그 다음, 현재까지 시베리아로 풀어놓은 사백력지(斯白力之)는 하나님의 자리가 천위(天位)로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인식되는 그곳, 천상(天上)이 그 유일신(唯一神)의 자리이기 때문에 땅(地)에 있는 시베리아가 신의 자리가 아니다.
이 기록에서 환인(桓因)과 유일신(唯一神)은 분명히 신과 인간으로 구별된다.
그래서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신이라 말하면 안 된다.
천부경(天符經)문서는 결국 유일신(唯一神)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모든 문자가 해석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문(漢文)의 모든 문자 역시 유일신(唯一神)의 뜻을 따라 사람의 마음이 신의 마음인 태양의 마음으로 변화 되어 따뜻한 빛을 비추게 되는 방법을 설명해야 정확한 해설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늘의 뜻을 바탕으로 하는 심령(心靈)을 말하는 인문학에 바탕을 둔 확실한 근거가 있는 한문(漢文)은 분명한 우리의 전통적 사상을 말하고자 하는 문자(文字)이다.
그러므로 한문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이야기보다 더 깊숙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밝히면서 그 마음이 찾아야 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천부경(天符經)이 사람의 마음이 태양(太陽)의 마음으로 변화 받게 하는 당위성이 있는 한문(漢文)을 사용하면서 천부경(天符經)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유일신(唯一神)이 준 대한(大韓)의 글이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위 내용을 보면 중국과 대한민국의 한자기원에 대한 기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천부경 이야기입니다.

천부경(天符經)의 한문자에서 부신 부(符)자는 상서 수결에 더하여 증험(證驗)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어 하늘의 임금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고 증거하게 하는 방법을 적을 경전이란 뜻이다.

천부경을 적어봅니다.
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천일일 지일이 천일삼 일적십거 무궤화 삼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대삼합 육생 칠팔구운
삼사성 환오칠 일묘연 만왕만래 부동변
본심 본태양 앙명 인중천 지일일종 무종일

한문은 안 적었지만 그 내용입니다.
천부경은 증산도계열이 추종하는 문서라 하지만 천손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단인이며 조선의 백성으로서의 신의 후손이라 말하는 우리는 이 문서를 바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해석 점을 위한 문화로 해석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문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사서오경의 핵심에 있는 중용을 파생시킨 경전입니다.
그 근거는 중용해석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중용장구서나 독중용법을 보면 <고대부터 전수되어 온 성신(聖神)의 도(道)를 말하는 천(天)의 사상을 후대에게 전하여지다가 일어버리지 않을까 하여>라는 문장이 이미 중화문명의 시조인 서융(동이족과 동족)의 천부경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부경(天符經)에서의 핵심은 본심(本心) 본(本) 태양(太陽) 앙(昻)명(明) 인중(人中)천(天)에 있어 천부경(天符經)은 사람의 본래 마음과 태양의 마음으로 구별을 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천지인(天地人)의 이야기에서 가운데 글자는 일(一)은 본성을 찾기 위한 문제로 첫째이며 이(二)는 태양심을 찾기위한 문제로 둘째이며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 본심을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로 셋째 글자를 일(一)로 보면 첫째는 하늘 둘째는 땅 셋째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심을 태양심으로 바꾸려는 사람의 이야기인 둘째에서는 하늘도 셋째인 사람에게 땅도 둘째인 사람에게, 셋째인 사람도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기준으로 제가 쓴 책의 내용을 다시 봅니다.

<사람 마음의 기본이 태양의 기본에 올라가 밝은 빛을 비취면, 인격, 성격(사람(人)의 뜻)의 가운데 마음이 하늘이다.>
천부경(天符經)은 천부(天符)의 뜻과 같은 맥락으로서의 “본심 본태양 앙명 인중천(本心 本太陽 昻明 人中天)이 통독적 개념으로 보는 문장 전체의 핵심이다.
한문이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라면 당연히 한문에는 천부경을 설명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그 뜻을 풀면 그 답이 나온다.

여기에서 태양(太陽)으로 설명되는 그 하늘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행복이다.
태양(太陽)에서 클 태(太) 자에는 심(甚), 최초(最初), 세(細)지(之)대(對), 태(泰)통(通)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태양이란,
<심한 기쁨과 행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먼저 중후함으로 가볍고 엷은 사람을 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넉넉하고 편안함을 누리상태>를 말한다.
이는 통과해야 할 또 다른 클 태(泰) 자가 <크다, 넉넉하다, 편안하다, 편안하고 자유롭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 상태를 안식(安息) 즉, 숨이 평안해진 상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太陽)에서 볕 양(陽)자에는 일(日, 太陽精人君象), 陰之對 總是一山南水北, 氣分爲陰 在洽之-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이는,
* <만물을 생장시키는 따뜻하고 온화한 빛으로서 코끼리의 뜻같이 물어뜯고 주장하는 임금 같이 행세하는 것을 사람이 되기 위한 분벽력을 사용하게 하는 태양>
* <어두움의 행실에 묻혀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여 바르고 옳음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르치는 사상이 있는 곳으로 도망하게 하기위해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고 가르치는 것처럼 인도 한다>
* <자기의 기를 음에 머물러 살고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흡수하는 자리로 나아감>
이라는 뜻들을 가진다.
그래서 태양이란 단순하게 하늘의 태양이나 어떤 신적인 존재로서 바라봐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 태양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사람이 되기 위해 찾아가야 할 목적이다.

천부경(天符經)을 바로 이해하려면 사람의 가운데 즉, 사람의 마음에 행복으로만 살아가는 하늘이 있기를 소원하려면, 사람의 본심이 태양의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라는 명령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천부경(天符經)의 이야기들을 해제(解題)하자면,
천부경(天符經)이란 보이는 세상에서 자기를 앞세우고 싶어 하는 인간중심의 본성을 유일신(唯一神)의 요구를 따라 유일신(唯一神)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사람 모두와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타인까지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감춘 비밀의 이야기

라고 해야 할 것이다.


⑵ 천부경(天符經), 숫자의 의미
一始 無始一(일시 무시일)
사람에게는 사람이 볼 수 있는 행위와, 그 행위의 근본으로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없는 마음과 그 마음 가운데에 존재한다는 본성이 있다.
그 논리에서 <시작된 하나와 없는 곳에서 시작된 하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마음으로 하늘의 임금을 본받고 증험하여 타인에게 증거 하여야 할 사람에게 보여주는 행동은 어디에서 시작할까?
이는 분명 사람의 마음에서 그 시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설명은 <시작되는 그 하나는 보일 수 없는 그 하나에서 시작 한다>라고 해야 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해가 시작됐다면 행동을 위한 가르침과 마음을 위한 가르침 중 어떤 가르침이 중요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의 일(一)이란 한 사람의 행동과 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의 마음을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析三極 無盡本(석삼극 무진본),
여기에서의 수는 삼(三)이다.
삼(三)과 연결된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석(析)자는 ‘가르다, 쪼개다, 해부하다, 나누어 밝히다,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나누어지다, 흩어지다, 분산되다’로 ‘분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삼(三)은 천지인(天地人) 이 셋을 가리킨다.
극(極)자는 ‘다하다, 떨어지다, 남아있지 않다, 끝나다, 그만두다, 극, 한계, 전극(電極), 자극(磁極), 끝, 일의 결과, 용마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無)’자는 ‘없다’라는 뜻이며,
‘진(盡)’자는 ‘다하다, 끝’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그 누구라도 지능을 바탕으로 하는 지혜와 생각이 있다.
이 중에 있는 생각은 자신도 그 끝을 다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이라는 생각을 타인에게 맞추어 보면 더더욱 알 수 없다.
육신(肉身)을 위한 욕심(慾心)이라는 본성(本性)을 이루기 위해 그 마음에 존재하는 생각과 성품과 감정, 이 세 가지에 대하여는 타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조
차 알 수 없는 것이 쪽박만한 머리를 가진 인간(人間)의 한계이다.
‘없는 곳에서 시작된 하나에서 셋의 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근본의 끝을 모르는 것!’
그래서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 안에 있는 <천지인(天地人) 이 세 개의 그 끝을 아무리 분석(연구)해도 그 근본의 끝을 다 알 수 없다>라고 말하기 위해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의 성품으로 변화 받아는 방법을 몸의 행동이 아닌 사람의 성품에서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조화를 위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다스리는 그 신(神)의 이야기가 우주가 아닌 사람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문장이해를 위한 설명(說明) 중에 저절로 형성된 천지인(天地人)이 바로 삼(三)이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여기에서 천지인(天地人)인이 일(一)과 이(二)로 구분되어 있다.
이것을 천부(天符)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 안에서 ‘一始 無始一(일시 무시일)’을 앞세우고, 행동하는 몸과 그 행동의 시작인 마음의 일로 본다면 일(一)은 보이는 우주(宇宙)의 일이요, 이(二)는 보이지 않는 마음(心)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그렇게 구분하고 보면 보이는 세상을 향한 일(一)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일(一)의 개념은 우주(宇宙)에서 천지인(天地人)을 찾는 사람으로 하늘이 첫째(一)요, 땅은 그 둘째(二)이며, 사람은 그 셋째(三)이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천지인(天地人)을 설명하는 마지막의 수(數)들, 일(一) 이(二) 삼(三)은 사람이 보는 그 순서(順序)가 된다.
그리고 그 순서(順序)는 사람이 보는 관점(觀點)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수(數)를 사람이 보는 관점(觀點)으로 본다면 두 번째 문장이 설명하는 이(二)가 중심인 천지인(天地人)에서도 그 마지막 숫자인 삼(三) 역시도 사람이 보는 순서(順序)적인 관점(觀點)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수를 순서(順序)적인 관점(觀點)으로 보게 되면, 보이지 않는 본심(本心)에서 천지인(天地人)을 찾는 이(二)에 나타난 숫자 삼(三)은 본심(本心)이 있는 사람(人)이다.

一積十鉅(일적십거)
하나(一)로부터 시작하여 십(十)을 쌓게 되면 짜여 진 틀이 없는 셋이라고 했다.
하늘 임금의 모양을 체험하고 증거 하는 것이 천부(天符)라고 했다.
오직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자기만을 위한 사람의 본심(本心)이 태양 위에 올라 빛을 발한다는 것에서 사람의 본심(本心)은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며, 태양(太陽) 위에 올랐다는 것은 완성된 것을 뜻한다.
그렇게 보면 신과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진법과 같이 영(0) 과 일(1)로 나누는 계산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은 0과 10으로 구분 할 수 있어 본심(本心)의 상태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일적십거(一積十鉅)라는 십진법적인 계산으로 놓고 보면 자연수 0과 만들어 가는 수 일적십거(一積十鉅)의 수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0을 제외한 1-10의 수(數)는 본심(本心)을 버리고 태양(太陽) 위에 오르기 위해 각각의 순서에 맞는 사람의 수단(手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無櫃化 三(무궤화 삼)
궤가 없게 되는 그 셋은 무엇일까?
그 셋의 답은 삼극(三極)에 있다.
열심히 연구하여 찾아야 하는 삼(三)은 모든 것의 끝인 극(極)의 모양을 찾아야 하는 천지인(天地人)이다.
그래서 그 셋(三)은 일(一)에서 찾는 천지인(天地人)과 이(二)에서 찾는 천지인(天地人)인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개념 차이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도 삼극(三極)은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했다.
그 끝을 위한 삼(三)은 우주(宇宙)에서나 사람의 본심(本心) 안에서 찾아야 할 천(天)과 지(地)와 인(人), 이 셋을 지칭한다.

大三合六生七八九運(대삼합 육생칠 팔구운)
큰 것을 위해 어긋남이 없이 하나로 합해야 할 삼(三)이 있다.
본심(本心)이 태양 위에 올라 빛을 발하기 위해서 천지인(天地人)을 본심(本心)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천지인(天地人)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아야만 육(六)이 생겨나서 칠팔구(七八九)를 돌게 한다.
이 삼(三) 역시 천지인(天地人)이다.
그리고 육(六), 칠(七), 팔(八), 구(九)는 일(一)에서 시작하여 십(十)을 이루는 과정 중에 있는 수(數)들이다.

三四成環五七一妙衍(삼사성 환오칠 일묘연)
그래서 묘하게 돌아가는 수(數) 오칠(五七)이나 오칠(五七)을 돌게 하기 위해 이루어야 할 수 삼(三)과 사(四) 역시 사람 안에 있는 천지인(天地人)을 중심으로 하여 본(本) 태양(太陽)으로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로 보면 천부경(天符經)에 나타난 숫자가 본심(本心)상태에서 변하지 않은 숫자들이 있다는 반대적인 설명도 있다.
그 반대적인 숫자의 뜻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 받지 않는 자들에게도 변하지 않은 오(五)와 칠(七)을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행동하는 인격의 등급이 있다는 말이 된다.
보이는 세상을 향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삼사오육칠(三四五六七)과 자신의 마음을 보는 사람이 가진 삼사오육칠(三四五六七)!!
보이는 천지인(天地人)만 쳐다보다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위한 그 일(一)도 시작하지 못한 사람과, 마음에서 그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이루기 위해 천지인(天地人)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참 묘한 것이다.
그럼에도 천부경(天符經)에서는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이루기 위한 각각의 숫자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나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 일적십거(一積十鉅)의 수는 그 규정과 방법이 명확한 성경해설 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地一 一終 無終一(지일 일종 무종일)
“땅 하나가 그 하나로 끝내도 하나로 끝암이 없다.”
천부(天符)를 이루기 위한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설명하는 천부경(天符經)에서 숫자와 연결된 모든 것은 사람의 상태이다.
그래서 땅 지(地)자 역시 일(一)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땅을 말하지만 이(二)로 말하는 본심이 태양의 마음으로 변화 받은 그 땅은 곧 사람이다.
그래서 그 땅 하나에서 일(一)이란 모두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이미 이룬 후의 상태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천부경(天符經)에 나타난 모든 숫자는 천부(天符)를 이루기 위한 사람의 그 마음과 성품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이루고 타인들에게 따스한 빛을 비추어 스스로 옷을 벗게 하는 또 다른 가르침의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을 나타내는 수(數)들이다.


3. 한문에서의 숫자 해설
천부경에는 일(一)에서 십(十)에 이르기까지의 수가 나온다.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내용을 기록으로 나기기 위해 배달 천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녹도문(鹿圖文)을 이해한다면, 뜻글자인 한문에서의 숫자 역시 그 해설(海雪)이 천부경(天符經)을 해설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문이 가진 숫자의 개념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문사전인 옥편에 달려 있는 주석을 근거로 숫자를 해설한다.
그리고 그 십(十)까지의 수는 셀 것이 없는 것이 하나부터 시작하여 2, 3, 4, 5, 6, 7, 8, 9, 라는 수를 하나씩 거치면서 십(十)이라는 과정을 목적하여 결국에 그 목적하던 뜻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한문의 수(數)자는 ‘세다, 계산하다, 셈에 넣다, 세어서 말하다, 들어 말하다’라는 뜻과 함께 계(計)야(也)가 있어 ‘꾀, 계략, 계획, 경영, 꾀하다, 계획하다, 의논하다, 세다, 헤아리다’ 라는 뜻이다.
이 수(數)자는 또 ‘빽빽할 촉’ ‘여러 번, 재빠를 삭’이라고도 읽어 수와 수 사이를 띄우면 안 되고 바로 이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며 모든 수(數)를 넘어가는 동안 재바르게 행동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그래서 천부경(天符經)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문에서의 이 헤아릴 수(數)자 해석의 근본은 각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수가 말하는 위치에서의 자기 성찰을 위한 헤아림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일(一)에서 십(十)까지의 헤아림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1. 한 일(一)
일(一)은 수(數)지(之)시(始), 순(純)야(也) 순전할, 제(第)지(之)본(本)이라 되어있다.
‘수지시’에서 ‘수(數)’는 ‘헤아리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지시’는 <헤아려야 하는 그 첫 번째 시작>이라는 뜻이 된다.
‘순야’에서 ‘순(純)’은 ‘순전하다’라는 뜻이다. 순전(純全)이란 순수함과 온전함이다.
이는 모든 수의 시작은 순전(純全)함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것으로 그 차례도 사람의 심(心)인 마음에 모든 것을 맞추어 놓고 헤아려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지본’에서 ‘제(第)’는 차례를 뜻하기 때문에 ‘제지본’은 차례의 근본을 뜻한다.
모든 차례의 근본은 태양심(太陽心)으로 변화해야 할 사람의 본심(本心) 즉 마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합쳐서 본다면 모든 수(數)는 사람의 성품이 변해가는 과정을 찾아 마음을 헤아리는 법에 관한 처음 시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차례란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길 즉, 도(道)에 서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길인 도(道)에 서있는 것과 그 순서인 차례 밖에 있는 무질서가 구분된다.
그래서 무질서를 버리고 십(十)이라는 목적과 그 방법을 찾는 일을 시작해야만 그 일(一)이라는 헤아림(數)이 있다.
또 십(十)이라는 그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속의 일들을 찾아 볼 수 있는 순전함이 있어야 일(一)이라는 헤아림의 수(數)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전함이 십(十)으로 가기위한 마음을 버리고, 무질서 속에서 존재하는 육체의 행실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순전함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두 이(二)
둘을 말하는 이(二)에는 수(數)일지가일(一之加一), 어(於)천(天)하(下)이(異)심(心) 두 마음, 의(疑)야(也) 의심할, 일(一)생(生)-생(生)삼(三)동(同)야(也) 같을, 공(功)무(無)분(分)야(也) 나눌 이(二)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수(數)일지가일(一之加一)’란 첫 번째 헤아림에 또 하나의 헤아림을 더 한 두 번째 헤아림>이라는 의미이다.
‘어(於)천(天)하(下)이(異)심(心) 두 마음’에서 어(於)자는 ‘어조사(于), -에, -에서(처소격), -보다(비교격), -를(목적격), -에게(여격), 있어서, 있어서 하다, 이에, 이에 있어서’라는 뜻이다.
그래서 ‘어(於)천(天)하(下)이(異)심(心) 두 마음’에서 둘 이(二)란 사람의 마음속에 천(天)과의 마음과는 다른 지(地)가 요구하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는 것이다.
천(天)의 요구는 성품을 살피는 마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地)의 요구는 사람에게 보여야 할 행동 결정을 위한 마음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는 천(天)의 요구인 성품을 위한 마음과 다른 지(地)의 요구인 행동에 대한 마음에 관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일(一)에서 순전함을 가지고 마음에서 시작된 태양심(太陽心)의 목적을 위한 노력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이심(異心)은 행동에서 조차도 태양심(太陽心)을 따르고자 하는 행동이 있음을 발견해야한다.
둘 이(二)에서 ‘의(疑)야(也) 의심할’이란 일(一)과 이(二)의 차이점 하나를 볼 수 있다. 이는 하나 일(一)자가 가진 ‘순전함’과의 차이로, ‘순전함’의 반대말이 ‘의심’이라는 이야기이다.
‘일(一)생(生)-생(生)삼(三)동(同)야(也) 같을’이란 ‘하나로 낳아져 살아가는 것이, 셋으로 낳아져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라는 것이다.
이는 삼(三)자에서 그와 같은 뜻을 찾아야 한다.
그 삼(三)에 있는 비밀을 미리 말하자면, 이(二)와 동(同)인 삼(三)은 일(一)과 이(二)에 관한 교훈을 바로 알고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행동에 있다.
그래서 이 생(生)삼(三)과 동(同)인 이(二)는 자신(自身)과 신(神)만 일 수 있는 마음에 관한 교훈에 더하여 사람들이 보고 말 할 수 있는 행위에 관한 교훈이란 뜻이 된다.
‘공(功)무(無)분(分)야(也) 나눌’에서는 ‘나눌 수 없는 공(功)이지만 그래도 나누어야 하는 공(功)을 말한다.
이는 일(一)과 이(二)가 말하는 구분된 일에 대해 서로 자랑꺼리로 삼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그 구분은 정확히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이(二)자는 십(十)을 목적으로 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마음과 행실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나누기도 한다.
그중에서 십(十)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이 이(二)자는 조용히 자신을 보면서 행동에 관한 이치를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석 삼(三)
삼(三)자는 ‘셋, 세 배, 세 번, 헤아릴, 이지가일(二之加一) 석 삼, 빈(頻)야(也) 삼’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지가일(二之加一)이란 ‘이에서 하나를 더하다’라는 의미로 이에서 삼으로 자라난 상태를 설명한다 할 수 있다.
빈(頻)자에는 수(數)야(也) 헤아릴, 비(比)야(也) 견줄, 급(急)야(也) 급할, 빈(頻)비(卑)통(通),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수(數)’는 ‘세다, 계산하다, 셈에 넣다, 세어서 말하다, 들어 말하다’라는 뜻이다.
비(比)는 ‘견주다, 본뜨다, 모방하다, 따르다, 좇다’라는 뜻이다.
이를 해설하자면 십(十)을 목적으로 하는 그 헤아림들 중에서 일(一)과 이(二)를 통해 발견한 것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일(一)과 이(二)에서 찾은 그 가르침들을 모방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급(急)은 ‘급하다, 갑자기(亟), 빠르다’라는 뜻이다.
이는 알고 깨달은 것들을 자기의 생활에 적용하되 급하게 그리고 빠르게 적용시켜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을 수반한다.
빈(頻)비(卑)통(通)에서 ‘빈(頻)’이란 ‘자주, 빈번히, 절박하다, 급박하다’라는 뜻이며, 비(卑)는 ‘낮다, 낮은 사람, 천하다, 저속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삼(三)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통과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십(十)을 이루기 위해 가고 있는 이 삼(三)이 설명하는 과정이!!
일(一)에서 십(十)을 이루어야만 생겨나는 천(天)에 있는 태양심(太陽心)의 반대인 지(地)에 있는 본심(本心)과 그 본심을 따라 행동하던 행위는 절대로 선(善)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선과 반대가 되는 악(惡)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삼(三)은 그 악한 자신을 발견하고 드러내면서 신에게 고백하는 헤아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그래서 이 삼(三)이 말하는 헤아림의 수(數)는 드러나는 몸의 행실에 있다.
이(二)에서 말한 ‘일(一)생(生)-생(生)삼(三)동(同)야(也) 같을 이(二)가 있었다.
살펴보면 이(二)란 성품이 있는 심(心) 안에서 찾아야 할 행실의 법을 깨우치는 과정이란 뜻이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행실의 법을 따라 그 법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태양심(太陽心)에 도달하기 위한 십(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그 악(惡)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4. 넉 사(四)
넉 사(四)자는 넷, 네 번,이라는 뜻과 함께 수명(數名) 넉 사, 사방(四方), -차(次) 네 번째. 사통(肆通)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수명(數名)은 헤아림의 네 번째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방(四方)에서 방(方)자는 방향이라는 뜻과 함께 모가 난 즉 각이 진 날카로움을 뜻한다.
그래서 이 사방은 네 방향에서 오는 괴롭힘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은 타인이나 환경이 주는 괴롭힘에서 감정과 기분이 치솟고, 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次)자는 ‘버금, 다음, 둘째, 잇다, 뒤를 잇다, 다음에, 이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차(次)가 말하는 다음에 찾아야 할 네 번째는 셋인 삼(三) 다음에 있어야 할 넷인 사(四)라는 순서적인 의미를 알게 한다.
사통(肆通)에서 사(肆)는 ‘방자하다, 극에 달하다,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말하다’라는 뜻과 함께 ‘방자(放恣) 늘어놓을 진(陳)에 장(長)과 더디다 사통(四通)’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방(放)자는 ‘놓다, 내치다, 좇아내다, 추방하다, 놓이다, 석방되다, 추방되다’
자(恣)자는 ‘방자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 맡기다, 하고 싶은 대로 맡기다’라는 뜻이다.
극에 달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버리기 위한 것이나 얻기 위한 것 등의 모든 일에서 그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과의 행위문제에서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평가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자기 감정이나 생각 마음이 가진 뜻을 제대로 펼 수가 없다.
마음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자기가 가진 자기중심을 버리려고 하는 사람은 보여지는 행위를 말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존심도, 영웅심도, 인간의 몸을 위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타인과의 다툼을 만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 일에는 바보라는 말이나 무능하다는 말도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삼(三)으로 설명되는 그 실천적인 행위가 바탕인 된 사통(四通)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괴롭힘도 자신의 심(心)을 위해 일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 사통(四通)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신껏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남들의 말과 행동으로 하는 비난이나 편견은 생각하지 않고서!!이런 행동에 피해를 당하면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타인들, 특히 가족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방자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肆)자가 가진 뜻의 하나는 태양심(太陽心)을 바라므로 보편적 인간의 방법을 끝내기 위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四)의 파자로는 나라 국(囗)자 안에 어진 사람 궤(儿, 人也)자가 있다.
두 가지의 천지인(天地人)중의 하나인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의 천지인(天地人)에서 임금인 천(天)은 그 사람의 생각들과 감정들과 기분들을 태양(太陽)의 마음으로 변화받기 위한 절대 가치관을 앞세우는 자아(自我)의지(意志)이다.
그 절대 가치관이 임금이 되는 ‘나라’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관에 의한 자기 기준들이다.
사람 인(人)자는 인품 인격의 뜻과 함께 달려 있는 주석이 동물최영지오행수기(動物最靈者五行秀氣)라는 주석을 가지고 있다(보편적으로 대명사로서 ‘놈 자’로 읽는 ‘者’자가 형용사나 형용동사일 때에는 ‘어디에 도달하다, 이르다’라는 ‘지’자로도 읽는다).
그래서 이 인(人)자는 동물이 가장 영적인 상태에 도달하여 사람들의 기운 중 으뜸 되는 기를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태의 인격을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어질게 된다.
무엇 때문에?
보편적인간의 방법을 따라 행동에 대해 말하는 모든 논리는 틀린 것이라는 것을 그 알고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四)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달관하고서 세상이 주는 모든 고통을 고통이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그 고통들을 모두 자기의 심(心)을 위한 교훈을 주는 고마움으로 받아드리면서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5. 다섯 오(五)
다섯 오(五),자는 음(陰)양(陽)중(中)교(敎) 다섯 오, 오(伍)통(通)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중(中)자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가운데 마음’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주석에는 ‘사방지앙(四方之央) 가운데 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앙(央)자는 ‘가운데, 다하다, 끝장나다, 오래다, 시간적으로 멀다’라는 뜻으로 오지(奧地)라는 뜻과 상통한다.
‘음(陰)양(陽)중(中)교(敎)’란 ‘마음 가운데에서 음양(陰陽) 가르치다’라는 말이다.
사람의 몸이 아닌 사람의 기운이나 인격 인품을 사람이라고, 그렇게 보는 사람의 가운데는 사람의 성품이 있다. 그 성품에서 음과 양을 가르친다는 것은 음(陰)을 버리게 하고 양(陽)으로 변화되는 헤아림을 말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伍)통(通) 다섯 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오(伍)는 ‘대오, 조(組), 섞이다’는 뜻과 함께 오인(五人), 군열(軍列) 오(伍)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는 자신과 싸우는 조직적인 군사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五)는 두 이(二)부에 있다.
이는 순전함을 찾는 일에 1,2,3,4에서의 일(一)과는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을 말한다.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의 일(一)은 생각의 변화요구이다.
그러나 오는 생각의 변화 이후 천경과 신고가 요구하는 성품(性品)변화를 위한 순전함에 대한 요구가 된다.
생각의 변화를 반복하여 성품의 변화로!!!
오(五)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성품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성품 성(性)자에서 알아볼 것이다.
사(四)가 가진 뜻에서 사통(肆通)이라는 그 단어는 육체적인 행위에서 옳고 그름을 찾는 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이 오(五)는 그 생각이 육체나 육체가 행하는 행위에서 찾는 의를 벗어나서 이제는 마음에서 찾는 의나 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가운데라는 것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그릇과 같다.
그 그릇에 담긴 것이 어떤 것인가?
마음 심(忄)자와 날 생(生)자의 합성어인 성품 성(性)자는 마음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마음의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그 성품에게 음과 양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은 음(陰)을 버리고 양(陽)으로 살게 하려함이다.
태양(太陽)심의 마음으로 살기위한 방법 안에서 십(十)으로 자라가기 위한 오(五)자의 비밀은 사람 안에 있는 성품의 변화였다.

6. 여섯 육(六)
육(六)은 ‘여섯, 여섯 번, 죽이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주석에는 수명(數名) 여섯, 육(陸)통(通)이라는 주석이 있다.
여기에서 육(陸)이란 ‘뭍, 육지, 언덕, 높고 평평한 산의 꼭대기’라는 뜻과 고(高)평(平)왈(曰)-뭍 육, 로(路),부(
  • 국정기획조정
  • [2013-02-22]

안녕하십니까. 국정기획조정분과입니다.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귀하께서 제안해주신 내용은 새 정부 정책 추진 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신데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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